남사당은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 예인집단이다,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떠돌이 예인집단은 남사당패를 비롯하여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사당패, 걸립패, 중매구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중에서 그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남사당패가 첫손에 꼽힌다.
남사당패의 연원이나 역사적 형성과정을 밝히기에는 현존하는 자료가 빈약한 편이다. 유랑하는 민중놀이집단에 대한 기록으로는, 《해동역사》에 이미 신라에 인형놀이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고려사》 폐행전(嬖幸傳) 전영보전(全英甫傳)과 《문헌통고》 ·《지봉유설》 ·《허백당시집》 등에서도 역시 괴뢰목우회(傀儡木偶戱)나 그 연희자인 광대(廣大)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때그때의 단편적인 기록에 불과하여 유랑예인집단의 연원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을 비롯한 그 밖의 사서류나 문집이나 잡기 등에서도 시종 편증(偏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봉건적 질곡 속에서 싹튼 민중의 자생적 연희집단에 대한 지배계층의 도식적 평가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이 문헌들은 민중의 이해와는 거의 대립적인 입장에서 기술된 것으로, 그 내용상의 분류조차 못하고 있지만, 1900년대 초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 또는 자연발전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남사당패의 놀이는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등 여섯 종목이 남아 전한다. 얼른(요술) 등의 종목은 이미 인멸되었다.
● 풍물: 첫번째 순서인 풍물은 주로 웃다리가락(충청·경기)을 바탕으로 한 농악이다. 그러나 남사당패는 팔도를 유랑하는 까닭으로 웃다리가락의 정수로 볼 수는 없을 것이며, 때로는 각 지방의 특색 있는 가락과 판제를 재치있게 수용하고 있는 면도 있다.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동니·열두발·채상 등의 체기(體技)와 묘기를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를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 버나: 대접이나 쳇바퀴 또는 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로, 접시돌리기를 연상시킨다. 버나는 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사람인 버나잡이와 받는 소리꾼 매호시(어릿광대)가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있어 극의 요소가 두드러진다.
● 살판: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본래는 대광대패나 솟대쟁이패의 놀이 가운데 하나였는데, 남사당놀이로 수용된 것이다. 땅에서 재주를 부리는 땅재주로 서양의 텀블링(tumbling)을 연상시킨다.
● 어름: 얼음 위를 걷듯이 어렵다 하여 줄타기를 이와 같이 부른다. 관가나 양반집에 초청받아 불려다닌 '광대줄'과는 달리, 일정한 보수도 없이 서민을 상대로 순회공연을 하기 때문에 역시 서민의 취향으로 짜여져 있다. 버나와 마찬가지로 매호씨와의 재담과 창이 있어 극적인 요소가 짙다.
● 덧뵈기: 덧(곱)본다는 뜻으로 탈을 나타내고 있다. 덧뵈기는 지역전승의 탈놀음에 비하여 의식성이나 행사성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취향과 흥취에 영합하였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더 우세한 풍자극으로, 네마당(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 덜미: 마지막 거리이며, 꼭두각시놀음을 일컫는다.
남사당패는 '꼭두쇠(우두머리, 모갑이)'를 중심으로, 일정한 보수없이 숙식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꼭두쇠란 명실공히 패거리를 대내외적으로 책임지는 우두머리인데,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고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다. 조직은 일사불란하여 오히려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만큼 엄격하였다.
꼭두쇠는 한 패거리에 한 사람이지만, 그를 보좌하는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규모에 따라 두 사람일 수도 있다. 곰뱅이는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라는 뜻으로,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놀이판을 벌여도 좋다는 승낙을 받은 일을 맡았다. 뜬쇠는 각 연희 분야의 선임자이며, 그 밑에는 해당놀이에 예능을 익힌 '가열(보통기능자)'을 두고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둔다. 이 삐리들은 가열이 되기까지 여장(女裝)을 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던 점이 특이하다.
남사당패의 은거지로 알려진 곳은 경기도 안성·진위, 충청남도 당진·회덕, 전라남도 강진·구례, 경상남도 진양·남해, 북쪽으로는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인데, 은거지에서는 놀이가 없는 겨울철에 동면을 겸하여서 삐리들의 기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남사당은 서민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지만 지배층으로부터는 심한 혐오와 수모의 대상이어서 마음대로 어느 마을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지배층으로터의 멸시 속에서도 남사당이 유지될 수 있었던 요인은, 꼭두각시놀음과 같은 인형극을 통해 현 사회의 모순을 연극적인 요소로 잘 소화해내 풍자함으로써, 서민들이 입장을 대변해 주고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남사당은 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서 어렵게나마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사당패의 놀이 중에서 꼭두각시놀음은 산대도감계통극에 비하여 더욱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ady)를 보여주며, 또한 그들에 의하여 오늘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