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국내 최초 근대식 의료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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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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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이란?

1885년(고종 22) 미국인 알렌(Allen,H.N)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의료기관

이미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처음 명칭은 광혜원(廣惠院)이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의사였던 알렌은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1884년 9월 우리 나라에
입국하여 미국공사관 무급 의사로 일하던 중 그 해 12월 4일 갑신정변을 만났다. 알렌은
우정국사건(郵政局事件)이라고도 하는 이 정변의 와중에 칼에 찔려 중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외과술로 치료하여 생명을 구했다.

또한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에서 부상당한 100여명의 청병(淸兵)을 치료해 주었다. 이런
일을 계기로 알렌은 고종 및 민비와 가까워졌고 곧 그들의 시의(侍醫)로 임명되었다.

고종은 알렌이 제출한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4월 10일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House of Extended
Grace)을 한성 재동에 설치했다. 병원 건물은 홍영식의 집(헌법재판소 자리)을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광혜원이란 명칭은 그 해 4월 26일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개칭되었다. 알렌은 하루에 최고 100명 정도의 환자를 볼 정도로 제중원의 명성은 날
로 높아 졌다. 알렌 혼자만으로는 업무를 담당할 수 없게 되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파견한 헤론과 엘러스의 도움을 받았다. 제중원에는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는데, 남녀노소, 거지나 궁중의 높은 양반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진료를 받았다. 제중원에서는
1년 동안 모두 10,460명의 외래 환자를 보았으며, 입원 환자는 모두 265명이었다.

1886년에는 제중원 의학교가 설치되어 선교의사들에 의해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교육이 이루어졌다. 제중원은 환자가 늘어나 장소가
협소해지자 1887년 서울 남부 동현(동현; 지금의 을지로 외환은행 자리)으로 이전했다. 제중원에서는 알렌에 이어 헤론, 빈튼이 제중원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893년 11월 토론토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이 제중원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제중원은 주사들의 부패로
운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다가 1894년 4월 에비슨이 지방에 왕진을 간 사이 주사들이 수술실로 만들려고 준비했던 방을 일본인 의사에게
세를 주는 일이 벌어졌다. 에비슨은 병원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조선 정부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6개월 동안의 협상
끝에 고종은 제중원을 에비슨이 대표하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겼다. 설립된 지 9년 만에 제중원의 성격이 민간병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도동]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이름은 바뀌었어도 일제 시기까지 세브란스병원은 흔히 제중원이라 불렸다. 지방의 선교 병원도 대구 제중원,
광주 제중원, 선천 제중원 등으로 불려 제중원은 한국인의 건강을 돌보는 병원의 대명사가 됐다. 한편 1908년 6월 3일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한 7명의 졸업생은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를 받았다.    더보기

제중원 실존 인물, 박서양과 주변 사람들

박서양(극중:황정)

1885년(고종 22) 9월 30일∼1940년 12월 15일
우리 나라 최초의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서울에서 백정(白丁) 박성춘(朴成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봉출이다. 아버지 박성춘은 장티푸스에 걸려 선교
의사 에비슨(Oliver. R. Avison, 魚丕信, 1860~1956)으로부터 치료를 받게 된 것을 계기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후에 은행가가 되었다.

어느 날 에비슨은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의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는다. 결혼식
이 끝나자 박성춘은 에비슨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사님,
이제 제 아들놈 장가보냈으니 병원으로 데려가셔서 사람 좀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비슨은 의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천민중의 천민인 백정의 아들로 살아온 박서양은 교회
학당에서 받은 교육 외에는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이었다.

얼마 뒤 에비슨은 박서양을 병원으로 데려 갔다. 병원 바닥 청소와 침대정리 등 허드렛일을
시키며 사람됨을 알아보았다. 궂은 일, 어려운 일을 아무런 불평 없이 거뜬히 처리하자
에베슨은 박서양에게 의학을 공부 할 기회를 허락한다.

1900년 8월 30일, 열 다섯 살의 박서양은 의학반 정규 과정에 입학하면서 우리 나라 최초의 의사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박서양은 에비슨이 맡고 있는 제중원의학교(후의 세브란스병원 의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6월 3일 제1회로 졸업하였다. 다음날 함께 졸업한
김필순, 김희영, 신창희, 주현측, 홍석후, 홍종은이 모두 대한제국 내부 위생국으로부터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증인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아
한국의 첫 면허의사가 되었고, 박서양은 면허번호 4번을 받았다.

박서양은 모교에 남아 후진을 양성했다. 하지만 박서양은 1910년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국권을 빼앗기자 1917년경 학교를 사임하고
간도 연길현으로 망명했다. 그는 그곳에서 구세의원을 개업했다. 의료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박서양의 역할을 막중했다. 일본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당시 연길현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으로는 ‘구세병원’이 유일했다. 박서양은 연인원 1만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는데, 그
중 1/3이 무료 진료를 받았다.

박서양은 병원사업과 동시에 교회를 설립해 이끌었고 얼마 후 장로가 되었다. 또한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숭신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활동
했다. 항상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그는 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는데, 대한국민회 군사령부
의 군의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만주제국이 만들어지면서 독립 운동이 여의치 않자 1936년 귀국하였고 1940년 고양군 수색에서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공로로 박서양은 2008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수여 받았다.    더보기

박서양과 주변 사람들

제중원
알렌
알렌 사진
헤론
헤론 사진
에비슨
에비슨 사진
왕실
고종
고종 사진
명성황후
명성황후 사진
민영익
민영익 사진
개화파
김옥균
김옥균 사진
홍영식
홍영식 사진

제중원, 그 시대적 배경

개화기 신여성으로의 변화

전통시대 특히 조선시대에 여성이 갖는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하여 지극히 열
하였으며, 그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여성에게 알게 할 것은 없고 다만 좇게 할 뿐’이라
는 유교적 명분이었다.

일부종사(一夫從事)와 칠거지악, 재가(再嫁)의 금지, 내외법(內外法)의 윤리가 양반사회
질서유지의 기본이 되어, 여성들은 규방에서 ‘인종(忍從)의 미’를 지키면서 살아가야 했
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 한국여성들의 지성(知性)은 다만 지아비를 하늘같이 섬기고,
자녀를 낳아 교육하여 혈통을 보존하는 데 쓰여졌을 뿐이며, 일체의 사회적 접촉으로부
터 격리되어 사회적으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사회생활에서 개인의 자각과 문명의 발달은 여성으로 하여금 그러한 위치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게 하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에
서구문물과 더불어 들어온 서학(천주교)의 영향으로 여성들이 새로운 세계관에 접하면서 이제까지의 자신들의 삶을 대상화시켜
볼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고,
그 과정에서 ‘천주 앞에서의 인간 평등’을 의식할 수 있었다. 한편, 1860년에 창도된 동학사상도 비록 제한적
인 의미에서나마 인간의 평등사상과 과부의 재가 허용을 주장하는 등 여성신분의 해방을 의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또한, 한
말에 기독교와 더불어 도입된 민주주의사상은 여성의 자유와 평등의식을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더보기

한국의 기독교 도입 : 계몽과 선교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개신교의 활동은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는 과정에서 들어온 선교
사들로부터 시작된다.
선교사들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무렵에 선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직접적으로 선교
하기보다는 학교와 병원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선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당시 외국의 종교는 배척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개신교의 복음을 선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한국에 온 직후
미국 공사에게 "우리는 교육사업을 시작하고 어학을 연구하려 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어 연구생이자 교육사업가로서 미국의 국기 아래 보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지금은 선교사업이 아니라 교육사업을 시작하려는데 어떤지요?"라는 편지를 썼다. 언더우드의 편지에는 직접적인
선교활동이 아니라 학교교육과 병원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선교하려는 자세가 나타나있다.    더보기

구한말, 격변기 그 때 그 사건

갑신정변
1884
제중원 설립
1885
갑오개혁
1894
을미사변
1895
아관파천
1896

내용자문 박형우 /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동은의학박물관 관장)